沙平驛 에서 / 곽재구
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
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
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
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
그믐처럼 몇은 졸고
몇은 감기에 쿨럭이고
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
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
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
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
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
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
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
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
침묵해야 한다는 것을
모두들 알고 있었다
오래 앓은 기침소리와
쓴 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
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
그래 지금은 모두들
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
자정 넘으면
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
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
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
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
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.
( 중앙일보. 1981)
곽재구 시인은
1954년 광주 출생 숭실대학교.대학원
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'사평역에서' 당선 등단
순천대학교 인문사회과학대학 문예창작학과 조교수
1986년 계간지 시와 사람 편집위원
1996년 제9회 동서문학상 수상
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사평역에서 당선
대표작 : 삶을 흔들게 하는 것들,
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, 참 맑은 물살
시 사평역에서,의 원래 모델은 남광주역입니다
시에 나타난 풍경들도 남광주역의 풍경이지요
시를 다 쓰고 나서 제목을 붙이는데
남광주역이라고 붙일 경우 너무 사실적이어서
환기력이 약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
그래서 적절한 역이름을 찾아야했는데 그때 찾은 이름이 사평이었습니다
사평이라는 지명은 강이 있고 모래가 좋은 곳에 붙이는 지명인데
우리나라에 이 지명이 꽤 많이 있습니다
평사리 또한 사평과 같은 내력을 지닌 지명이라 할 수 있지요
가장 한국적인 냄새가 나면서도
시적인 여운이 있는 지명(그걸면서도 기차역이 없는)을 찾다보니
사평역이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지요
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두루 행복하시기 바랍니다
곽재구 드림
* 기차는 8시에 떠나네 / Agnes Baltsa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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